
남석 이성조 선생 고희전 초대의 辯(변)
21세기는 사이버네틱스시대이다.
현재 우리는 연일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도저히 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개념이나 제도들이 잊는 도처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세대 간의 격차를 심하게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前時代가 경제와 군사력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文化와 情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문화의 정착기라기 보다는 前時代의 절대적인 개념들의 붕괴 위에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양한 모습으로 태동하는 변혁기라고 할 수 있ㅇ며 이러한 현상은 이 지역 대구 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변혁은 당연히 혼란을 수반하여 이러한 혼란은 우리들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쳐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는 역사적으로 내려온 가치관의 붕괴와 문화에 대한 절대적 기준에 대한 혼돈으로 외형적인 삶과 정신의 부조화로 인해 우리의 문화적 삶의 질이 황폐화 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우리의 정신을 주도하는 예술분야에서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전근대적인 형식의 탈피와 새로움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현대미술은 그 상당수가 너무나 무질서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나 그것을 감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술은 기괴한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치부하고 마는 경향이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조성됨으로써 더욱 방향을 잃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혼란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정리가 필요하고 그 바탕을 굳건히 함으러쏘 미래에 대한 명확한 방향제시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그 흐름이 멀게는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전반에 우리의 정신을 성숙하고 안정되게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예술의 정리와 미래에 대한 방향제시의 일환으로 공산 이남석 선생의 書業을 통찰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한다.
그리고 선생의 공적과 전시의 의미를 언급하기 이전에 현대에 와서 예술의 겉자리를 맴도는 듯하고 다른 장르로부터 창작예술로서의 존엄을 잃어가고 있는 서예의 본질과 현실에 대해 먼저 고론해 봄이 이해를 돕기에 적절할 것 같다.
첫째 과고 모든 문명의 핵심은 文字를 다루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이마아 문명의 점토판이나 황하문명의 갑골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등 모든 문명의 본격적인 발현은 문자를 쓰거나 새기는데소 비롯되었으며 특히 극동의 서예는 書畵同源이라하여 모든 회화의 근간의 되어 건축 조각등 다양한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둘째 현대에 와서는 서양의 마크 토비나 프란츠 클라인 등 추상표현주의에 여향을 미침으로 현대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이응노 남관 등의 작품에도 서예적인 영향을 배제하고선 그들의 작품을 얘기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서예적인 경향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작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서예의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특성들을 퓨전시대인 미래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 번의 붓질로 이루어지는 일회성은 음악이나 무용가 같은 시간예술로서의 특성을 가지며 완성된 작품은 시각예술로서 마무리 된다. 또한 선의 속도감과 리듬감 오천년 세월 속에 누적된 풍부한 자료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작가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서예를 지난 52년간 매진해온 공산 이남석 선생의 서예계에 미친 공적은 크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52년 동안 33회에 걸친 왕성한 작품 발표전을 통해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남석 서풍의 발현과 여러가지 작품 형식으로 많은 동료작가들과 후학들에게 자극을 주어 서예의 프로하(타 장르에 비해 아마추어적 경향이 강하다)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걸쳐 발표한 실험적인 전위 추상서예는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쳐 9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발전해온 현대서예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둘째 현현서회 남산한묵회 등 여러 서예그룹의 지도와 대학출강 등을 통해서 당시 대구서단의 楷行 일색의 서풍에 篆隸 書體의 유행을 불러일으켜 대구 서단의 활성화와 다양화에 기여한 바가 커 현 대구서단의 위치를 전국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선생은 168폭 초대형 묘법연화경 60폭 대형 금석고문병 등 서예사에 유례가 드문 대작을 끊임없이 발표함으로서 서예계 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을 문화재급의 각종 사찰이나 공공기관 학교 등에 현판이나 주련의 형식으로 남겨 생활 속의 서예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공적이 있지만 이 세가지로 大別하고 나머지는 선생의 연보 및 경력을 참고하기 바란다.
반세기는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 세월을 한결같이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서예에 대한 깊이를 추구해온 작가의 전시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에게는 물론이고 서예계 전체로 봐서도 기념비 적인 일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앞에서도 거론하였지만 사이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한 정서를 회복 시키는 정체성확보와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정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한 고찰 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번에 古希를 기념하는 선생의 대규모 기획전은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서단과 대구서단의 미래를 조망하는 의미 있는 전시임을 자부하며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희망한다.
-남석 이성조 선생 고희전 추진의원회-


1938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서 출생하여 인산초등학교 무안중학교 경남상고를 거쳐 1959년 국립부산사범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18세 때 한국 서예계의 큰 어르신인 청남 오제봉 선생(91년 작고)를 통하여 서예계에 입문하여 남석이라는 아호를 받았고 1959년 제 8회 국선에서 최연소로 입선하였으며 이후 13번에 걸쳐 입특선의 수상 경력을 갖게 된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수상경력은 이것 외에도 무수히 많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생계 때문에 35세까지 미술교사로 있었지만 붓을 놓지 못하였고 결국 속세를 떠나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분의 길이 아니었던지 1년 채 못 되어 환속하였지만 법확ㅇ을 통하여 화엄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66년 부산 공보관에서 가진 제 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서울부산대구울산안동영주포항경주구미 등지에서 총 32회에 걸친 전시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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